당진지역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곳으로 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와 구룡동 일원에는 승전목이라는 곳이 있다. 이배산과 응산 사이에 S자 모양의 협곡이다. 1894년 10월 서산시 운산면에 집결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1만 5000여 명)은 면천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 승전목에 500여 명을 매복시켰다. 매복조는 면천에서 출발해 이곳을 지나던 일본군 90여 명을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이런 기개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10일 당진시 면천면에 위치한 면천보통공립학교(현 면천초등학교)에서 충남도내 최초로 학생주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16세였던 면천보통학교 4학년 원용은 학생이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동급생 박창신,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과 함께 면천면 동문 밖 저수지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보다 10년이나 앞선 학생주도의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당진지역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면천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충청의 독립운동사, 학생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며,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중 한 곳이다.
■ 면천보통학교 학생들 3·10 만세운동 실행
당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면천 시내에서도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특히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면천에서의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학생만세운동이다. 따라서 학생독립만세운동사에서 선구적 의미를 가지며, 당진지역 항일운동에 도화선이 된 발원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면천교회의 초대 이상만 목사(홍성 출신)는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김구, 이동녕을 도와서 독립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세화 전도사는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인 원용은, 박창신, 이종원에게 이웃사랑 나라사랑을 가르쳤다고 한다.
면천공립보통학교의 3·10 학생독립만세운동은 충남지역 최초이자, 광주의 학생항일운동보다도 무려 10년이나 앞선 학생주도의 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 학생이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동급생인 박창신, 그리고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을 비롯한 9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면천면 동문 밖 골짜기부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학교 정문까지 행진했다. 96명의 학생들이 모여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초의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실행했던 것이다. 이후 면천주재소를 향하던 학생들은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들에 태극기와 깃대, 만장 등을 빼앗겼으며, ‘총을 맞지 말라’는 선생님들의 외침에 학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독립만세운동은 끝이 났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원용은, 박창신은 이틀 뒤 체포돼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 간 옥고를 치른 후 학적까지 말소되고 말았다.
당진에서는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학생과 지역주민들이 2007년부터 매년 3월 10일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열고 있으며, 학생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해 오고 있다. 당시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원용은과 박창신은 불과 17살과 19살의 나이였다. 1919년 3월 10일 일제가 봉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지정한 기념일에 맞춰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왕조의 상징적 의미가 담긴 면천읍성 객사를 허물고 면천보통학교를 지은 것이었는데, 오히려 이곳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진 것이다. 지금은 면천초등학교를 옮기고 객사를 복원했다.
■ 면장과 직원들 적극 독립만세운동 주도
충남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의 ‘남병사 댁’은 경성을 왕래하는 충청 유생(儒生)들은 이 집에서 쉬어가곤 했던 곳이라고 한다. 잠시 식객으로 머문 유생들은 서산과 당진의 경계인 대호만의 대호지 포구로 나가 화륜선을 이용해 서너 시간 남짓 걸리는 인천 제물포로 상륙하곤 했다. 제물포에서 기차(경인선)로 갈아타면 한나절 만에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귀향할 때도 육로보다 가깝고 편리한 해상 교통로를 택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남병사 댁’은 경성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접해 주위에 경성의 소식을 퍼뜨리는 정보 창구가 됐다. 경성에서 진행되는 3·1독립만세운동도 ‘남병사 댁’ 정보망을 통해 이미 대호지면 유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집 주인인 남계창과 남주원은 2월 27일경 경성에 올라가 만세운동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뒤이어 경성에 도착한 남상직 남상락 남상돈 이대하 이춘응 등 대호지면 유생들도 탑동공원의 3·1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상경한 유생들은 모두 의령 남씨의 문중 서당인 도호의숙(桃湖義塾) 동문이었다. 대호지면 도이리에 자리한 도호의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초빙하고, 남씨 문중 후손뿐 아니라 다른 성씨 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등 ‘열린 교육’을 펼쳤다. 도호의숙은 한학 교육만이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 교육에도 앞장섰다. 대호지면의 최고 부자이기도 했던 ‘남병사 댁’ 주인 남계창과 조카 남주원은 평소 집을 외부인에게 개방했는데, 넓은 대지에 100칸이 넘는 대저택은 시국을 걱정하는 애국지사들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묵객들로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당시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과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도 ‘남병사 댁’을 거쳐 서울을 왕래했다고 한다. 홍성 출신인 만해와 백야도 남병사 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면사무소는 식민 통치를 원망하는 시위대의 공격 대상이 되는 곳이 많았다고 하는데, 대호지면은 사정이 달랐다.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면장 이인정은 경상도에서 군수를 지낸 뒤 대호지면 사성리의 전주이씨 동족마을로 낙향했다가 고령의 나이에 면장직을 맡고 있었다. 강태완, 김동운, 민재봉,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들도 지역 출신이어서 지역민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독립만세운동 준비는 연계되는 관공서 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 보니, 순풍에 돛 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게다가 일제가 대호지면의 치안을 이웃 정미면 천의주재소(서산경찰서 관할)에 맡기고 있던 것도 만세운동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제는 대호지면은 정치·경제적으로 전혀 이익이 없는 지역으로 판단해 면사무소 이외에 별도의 통치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송재만 등 면사무소 직원과 대호지면의 젊은 청년들 위주로 구성된 선봉 행동대는 3월 하순에 들어서면서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거사는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7km 가량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로 정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호지면은 워낙 궁벽진 곳이라 장이 서지 않는 반면, 정미면의 천의시장에서는 이날 5일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만세운동 인원도 면장 명의로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의 건’이라는 공문을 돌려 면내 각 호(戶)에서 1명씩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했다. 4월 4일 오전 8시경, 대호지면 면사무소에는 부역을 하기 위해 400∼500명의 군중이 집결했다.
이때 면장 이인정이 앞에 나서서 “여러분들을 집합시킨 것은 도로 수선 때문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니 각자는 이에 찬동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나가자.”고 연설을 했다. 이어 ‘남병사 댁’의 남주원이 등단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도호의숙의 훈장 한운석이 스스로 지어놓은 애국가도 제창됐다. 이어 태극기를 맨 앞에 세우고 이인정 면장이 말을 타고 행진을 하자 군중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행진했다. 남주원은 군중이 용기를 내도록 술대접까지 했다고 전해지며, ‘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은 이렇게 진행됐다.
■ 당진독립운동, 4·4 독립만세운동 주역들
당진의 독립운동사에서 이인정(1859~1934)·송재만(1891~1951)·한운석(1884~1950)은 대호지면·정미면(현 당진시)에서 열린 4·4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이다. 고종 황제의 인산일과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온 대호지면 유생들과 협력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행했던 인물들이다. 이인정은 대호지면 면장으로 만세운동 준비를 지휘했으며, 송재만은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작성한 ‘도로 수선, 가로수 정리 건’ 관련 공문을 면내 8개 마을의 이장 집을 직접 방문해 전달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안내했다. 당진 ‘도호의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한운석은 독립만세운동 계획과 애국가 작사를 요청받은 후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작사하고 참여 계획을 논의했던 인물이다.
이인정은 4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00~500명에게 “도로 수선과 가로수 정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라고 연설했다. 이후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송재만은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냈고 애국가가 적힌 인쇄물을 배포했다. 송재만은 오전 11시경 천의 시장에 도착해 시장 일대와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오후에 귀가하려는 민중으로부터 태극기를 탈취하려 했으나 이에 군중들은 돌을 던지고 일경을 구타하며 저항했다.
일경의 검거로 이인정, 송재만 등이 체포되는 등 1차로 17명이 검거됐고, 이후 군인과 경찰에 의해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됐고 그중에서 54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이인정과 한운석은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고, 송재만도 같은 날 상고 기각으로 징역 5년이 확정됐다.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순국 3명, 태형 88명, 불기소 65명, 면소 4명, 징역 39명 등 199명이 처벌됐다. 이 만세운동 관련 인원 중 12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남상락(1990년 애족장)은 부인 구홍원과 같이 하얀 명주 천에 색실로 자수를 놓은 태극기를 사용했다. 이 자수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386호로 등재됐고, 독립운동가 홍보물에 반영되기도 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인정·송재만·한운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또한 충남 당진의 소난지도는 조선 시대부터 삼남 지방의 조세선 기항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내륙으로 이어진 수로를 이용해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등 충남 내포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의병총이 조성돼 있는 곳이다.
지난 1908년 3월 15일 처절한 항일의병항쟁이 일어난 장소였던 이곳의 의병 활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눠진다. 지난 1906년 당진 면천 출신인 최구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면천성을 공격했던 사건과 1907년 정미조약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이후 홍원식 의병장의 활약했던 시기로 구분된다. 특히 지난 1908년 3월 15일 당진지역 의병운동의 근거지를 소난지도로 판단한 홍성경찰분서가 이곳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이들에 맞서 싸운 홍원식 의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41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행방불명됐다. 이들의 항거는 이후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지난 1970년대 석문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힘으로 고증작업이 이뤄져 지난 2003년 당진시가 소난지도 의병항쟁 학술고증에 나서면서 비로소 실체가 확인됐다. 지난 2009년 이곳에 ‘의병항쟁추모탑’이 건립됐다.
한편 당진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인 심훈 선생도 기리고 있다. 심훈은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옥고를 치렀고 저항시 ‘그날이 오면’ 등을 남겼다.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에는 심훈이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가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